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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이미 도래한

나선
 
사진은 더 이상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회화가 되려고 하지도 않고, 회화를 대체하는 무엇이 되려고 하지도 않으며,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사진'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진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전히 회화의 것이었던 도상성을 추구하기도 하고, 대상의 실존을 증명하며 인덱스로서의 가치를 보존하는 아이러니를 보이기도 한다. 이 역설이 가능한 것은 “사진이란 무엇인가?”에서 “사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사진 매체를 향한 질문의 방향이 선회하는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상호 참조와 매개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고, 복제되고, 유통되는 이 전세계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매체의 구분은 와해되었고 끝내 무의미해졌다.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가 개별 매체가 주는 각각의 경험과 감각이 컴퓨터라는 종합적 기계 안에서 통합되었다고 말했듯, 매체 간의 융합과 연계 속에서 가능해진 총체적인 의사소통은 오늘날 매체 환경의 기본값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진 역시 탈장르화되었으며, 혼성과 모방의 문법을 따르는 광활한 이미지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사진술의 발명은 미술사에서 가장 파급력이 컸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는 회화를 통해 리얼리즘을 성취하려는 분투를 낳았고, 이 오래된 강박은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청산되었다. 그러나 회화와 비견되던 사진은 초기에 실재성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예술성을 의심받았고, 사진만의 존재론을 확립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게 된다. 대상을 촬영하여 상이 형성되는 순간만큼은 어떠한 외부 개입 없이 빛과 감광물질의 작용만이 있으므로 사진은 대상과 물리적으로 접촉되어 있으며, “여기에 있었던 것(that-has-been)”을 증명한다고 주장한 ‘지표성’ 이론은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사진 매체만의 특정성을 구축하는 데에 기여했다. 오늘날 조작이 가능함을 알고 있어도 사진의 객관적 지표성을 전제하는 관점이 잔존해 있는 까닭은 각 매체마다의 순수성을 통해 그 존재론적 가치를 견고히 하고자 한 모더니즘의 영향력이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실재와 구분 불가한 가상을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되고, 사진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의미가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텍스트’가 되면서 지표성은 사진의 정체성과 동일시될 수 없는 낡은 개념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사진에게 부여된 리얼리즘적 재현에 대한 환상 또한 해체되기 시작한다. '후기 사진 시대(Post Photographic Era)'로 불리는 오늘날, 이것은 사진의 종말이자 해방으로 해석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후의 시대는 혼란하며, 어디로든 향할 수 있게 된 사진은 다시 방황하게 된다. 사진의 지금과 다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이후’의 사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도래할 것인가? 미래를 향해 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안재영은 이미지 사이를 유영하고 있는 사진의 현재를,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과거를 더듬으며 거슬러 올라간다.
기술과 사진, 그 사이의 인식의 변화를 추적해 나가고 있는 그는 자신의 미시적인 서사를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사진에 대한 그의 관점은 시대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세 차례 굴절되는데, 첫 번째는 어렸을 적 간이 현미경을 통해 이미지의 망점을 보고 이미지를 점의 집합이라고 인지하게 되었던 사건이다. 이후 디지털카메라와 포토샵이 보편화되면서 이미지를 픽셀의 결합으로 재인하게 된 그는 곧이어 등장한 3D 렌더링과 생성 모델을 경험하며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실재를 압도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과도기를 경험한 이라면 누구나 겪어보았을 법한 개인적이고도 보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 《미도래》는 이미지의 생성 방식의 변화가 개인의 삶 속에 어떻게 편입되고 작동되는지 보여준다. 나아가 '사진'이 아닌 존재가 된 사진의 현주소를 짚어봄으로써 기술 변화에 따라 사회적 재현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성찰한다.
<Midore> 시리즈는 일상에서 숱하게 접하게 되는 ‘필터’ 씌운 사진을 연상시킨다. 사진 표면에 나타나는 아날로그 사진에서 볼 법한 질감은 이러한 기시감에 일조한다. 안재영은 렌더링과 생성 모델을 통해 색을 입히고 픽셀을 해체하거나 픽셀 사이의 공간을 형성하여 특유의 질감을 만들어내는데, 이와 같은 과정은 그가 경험해 온 사진에 대한 인식 변화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절차다. 이를테면 분절된 픽셀은 망점을 기반으로 한 과거 인쇄술을 암시하며, 렌더링과 생성 모델을 활용함으로써 보편화된 가상 이미지의 생성 방식과 그 형식을 투영한다. 이렇게 사진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인식의 변화를 한 화면 안에 압축해 놓은 <Midore> 시리즈에는 여러 겹의 시간성이 중첩되어 있다.
의미심장한 지점은 스펙터클의 무덤을 떠도는 유령인 ‘필터’에 씐 사진과 안재영의 사진을 육안으로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필터는 특정 스타일로 묶을 수 있는 사진 범주가 지닌 맥락과 역사는 제거하고 그것의 감각적 특징이나 분위기만을 축출하여 손쉽게 사진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상품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역사성’이라는 관점에서 두 사진은 선명히 변별되지만, 방대한 양의 이미지를 매일같이 딥러닝하며 구축된 인간의 감각 및 인식 체계 안에서는 불투명하게 뒤섞인다. 이러한 지점은 무의식적으로 행하게 되는 이미지 분류 작업을 얼마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동시대의 인식 체계는 압도적인 양의 이미지를 경제적으로 감각하기 위해 찰나에 파악되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지고 스키마(schema)에 따라 이미지를 분류하는 방향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때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생성 방식이 추측 가능하거나 대상의 실존을 짐작할 수 있을 때 그 이미지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진단내리곤 한다. 하지만 현실과 가상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형태와 맥락이 바뀌고, 이미지 사이의 차이가 얄팍해지고 있는 동시대에서 ‘본질’이라는 개념은 더는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상이나 공간의 실재성을 찾아 재빨리 대상의 ‘본질’을 확인하려는 ‘보는 방식(the way of seeing)으로 안재영의 사진을 들여다본다면, ‘필터’처럼 보이는 외피 너머의 두터운 시간성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사진 앞에서 느끼는 혼란은 지금껏 우리가 이미지의 파편들 속에서 수도 없이 행해온 판단 오류를 상기시킨다. 의도적으로 특수성과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는 개체나 공간을 피하고, 보편적인 순간과 상황을 포착한 <Midore>는 고정된 의미에 귀속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는, 잠재태(the virtual) 상태에 놓인 사진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의 미래를 상상하며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훑어내는 이번 전시 《미도래》는 이미지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동시대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어떠한 시각적 욕구가 결여되어 있는지 묻는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이 회화의 리얼리즘과 카메라의 발명으로 이어졌듯이, 가공할 속도로 변화하는 기술의 흐름이나 끝없이 양산되는 스펙터클 속에서도 해소되고 있지 않는 어떤 욕망 안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형식은 태동하고 있을 것이다. 안재영은 그 파동의 진원지를 화려하고도 낯선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첨단이 아닌 이미지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역사를 되짚어 보는 행위를 통해 찾는다. ‘사진’ 보다 ‘이미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사진은 인식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그의 ‘재매개(remediation)’적인 시도 안에서 구조되며 새로운 역사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1 최종철, (2014), 후기 사진 시대, 사진 예술의 향방, 한국영상미디어협회, 제 13권 제4호, pp.85-114
2 박평종, (2017), 포스트 포토그래피의 지표 패러다임과 수정이론, 미학예술학연구, 51, pp. 3-30.
3 디지털 이미지 구현 기술 의 괄목할 만한 성장과 이 기술의 전방위적 적용(저널리즘, 상업사진, 예술사진 등을 포괄하는) 속에서, 사진가들이 진실성이나 객관성 등과 같은 사진의 전통적 가치보다, 이러한 가치들의 해체와 재정립에 몰두하는 시대를 지칭한다. (“후기 사진 시대, 사진 예술의 향방” 용어 설명 참조 p.88)
4 윤곽이나 형태라는 뜻으로, 사상(事象)을 과학적으로 취급할 때 표준으로서 사용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형식을 이르는 말. 인간은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외부로부터 최소한의 정보를 인식한 후 배경 지식의 역할을 해주는 스키마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5 최종철, (2014), 후기 사진 시대, 사진 예술의 향방, 한국영상미디어협회, 제 13권 제4호, pp.85-114
6 폴 레빈슨이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앞선 테크놀러지를 개선하거나 수정하는 인간 성향적 과정이라고 정의한 개념. 새로운 미디어가 앞선 미디어 형식들을 개조하는 형식 논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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